파란바람 게시판

명사한마디 _ 영화와 역지사지 (영화감독 박종원)

보고 느끼고 2008. 11. 9. 22:40



서사 예술 장르에서는 ‘인물’들이 왜 갈등하고 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 한 예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저항할 것인지 굴복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관객들은 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재미있다든지 별 볼일 없다든지 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관객들은 이런 ‘캐릭터’의 갈등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온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흥미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시나리오의 알파와 오메가다. 좋은 시나리오는 인물들만 잘 풀어 놓아도 자연스레 만들어 진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이한 캐릭터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에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좋은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관건은 그 인물에게 갈등이 닥쳤을 때, 기발하면서도 개연성 있는 결정들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극의 갈등을 최고치로 올려놓고서 인물이 어떤 결정을 하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몇 주를 흘려보낸다. 이것이 시나리오 작업 과정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때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된다. 작가인 내가 극중 인물과 역지사지하고, 그 인물은 다시 극 안에서 다른 인물과 역지사지를 해봐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인물이 타당하거나 기발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나도 관객도 행복한 결말을 얻을 수 있다. 비록 그 이야기가 해피엔딩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 역지사지가 영화에서만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지혜는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 박종원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원한 제국'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친 박종원 감독은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제13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제29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최근 TV 영화 '정조암살미스터리 - 8일'을 연출했습니다.